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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정일근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쌀이 열리는 쌀 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농사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쌀 한 톨 제 살점같이 귀중히 여겨온 줄 알지 못하고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라는 비밀을 까마득히 모른 채서울은 웃는다.에서아주 오래 전 일이다. 24살 여고 동창생이 서울남자와 서울에서 결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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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희
2019.01.21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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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맹렬히 울어댔다.“야야~” 물기 묻은 엄마 목소리. “우짜믄 존노. 고만 집이 헐리뿟다. 진짜로 헐리뿟다” 엄마는 한순간에 허물어진 집을 우두망찰 지켜본 것 같았다.친정집이 헐리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구청의 도시계획으로 친정집 터에 도로가 생기게 되어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멀쩡한 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엄마의 상처가 더 클까봐 자식들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권유했지만 엄마는 친정집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집을 얻으셨다. 졸지에 집을 비워주게 된 후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빈집에 드나들면서 대문을 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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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희
2019.01.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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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중고서점에 들렀다. 열병식에 임한 군인들의 뒷모습처럼 빼곡히 나열된 책 틈에서, 낯설지만 친숙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 책을 집어 들며,‘나 같은 사람이 또 있네’ 했다. 물건 못 버리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였다. 친정엄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이게 언제 물건인데 아직도 있냐, 젊은 애가 참 미련스럽다”고 타박하실 정도였다.서점 한쪽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손끝에서 아무렇게나 나뉘는 쪽을 펼쳐 보았다. 공교롭게도 처음 눈에 들어온 글귀가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사람은 정신에 이상이 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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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희
2019.01.2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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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앞에 봄이 있다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어찌 한 두 번이랴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오늘 일을 잠시라도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높게 파도를 타지 않고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사랑하는 이여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추운 겨울 다 지내고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김종해, 詩集 /문학세계사 입춘이 지났건만 모진 추위에 마음까지 창백해지던 날이었다. 딸집에 며칠 다니러 오셨던 엄마를 모시고 신탄진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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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세종
2018.03.01 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