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하얀 이층집에 대한 예우
[기고] 하얀 이층집에 대한 예우
  • 윤현희
  • 승인 2019.01.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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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희

전화벨이 맹렬히 울어댔다.

“야야~” 물기 묻은 엄마 목소리. “우짜믄 존노. 고만 집이 헐리뿟다. 진짜로 헐리뿟다” 엄마는 한순간에 허물어진 집을 우두망찰 지켜본 것 같았다.

친정집이 헐리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구청의 도시계획으로 친정집 터에 도로가 생기게 되어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멀쩡한 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엄마의 상처가 더 클까봐 자식들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권유했지만 엄마는 친정집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집을 얻으셨다. 졸지에 집을 비워주게 된 후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빈집에 드나들면서 대문을 만져보고 돌계단에 걸터앉아 풀을 뽑으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셨다. 구청에서 집을 헐기 전부터 친정집은 이미 엄마의 깊은 한숨으로 반쯤 내려앉았으리라. 엄마를 애써 위로하고 수화 기를 내려놓았지만 엄마의 울먹임은 습설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몸은 대전에 있지만 마음은 부산에 가 있는 내게 남편은 친정에 가서 장모님을 위로하고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단비 같은 남편 배려에 고맙단 말도 제대로 못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결혼 전까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부산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지형이 높은 대연2동, 오래되고 가난한 집이 많은 동네였다. 우리집은 그 동네에서 가파른 언덕 중간쯤에 남자 중학교를 마주보며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하늘을 받쳐 든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아홉 식구가 부대끼며 살았던 낡은 집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재건축을 해서 이층집이 되었다. 언덕 빼기에 솟은 하얀 이층집은 높았으나 넓지 않았다. 아홉 식구에겐 방 한 칸이 아쉬운 터라 정원 한 뼘 둘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좁은 집안에 꽃 화분이 넘쳐난 것은 꽃 가꾸기가 유일한 취미였던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어김없이 국화 화분을 품에 안고 귀가하셨다. “애들 먹을 거나 사오지 쓸데없이 국화꽃만 사 들인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서 옥상으로 후다닥 올라가시던 뒷모습은 지금도 애틋하다. 어느 날인가 언덕 귀퉁이에서 뽑았을 법한 구절초를 한 움큼 쥐고 오셨는데, 다음 날 옥상에 올라가 보니 어제의 구절초는 처음부터 옥상 꽃밭에 있었던 것처럼 활짝 피어있었다. 평범한 것도 특별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손길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나는 구절초보다 더 활짝 웃곤 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꽃과 바다를 보았다. 옥상에는 아버지가 가꾼 꽃밭이 아기자기 꾸며져 있어서, 가을이면 노랑ᆞ·자주ᆞ·보라색 국화꽃이 만발했다. 나는 꽃밭 반대편에 놓인 평상에 엎드려 꽃을 바라보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졸기도 하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지금도 눈에 밟히듯 선명한 것은, 노을을 머리에 이고 앉아서 멍하니 광안리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만 안 내려오나? 밥 다 식는다!”는 엄마 고함소리에 놀라 계단을 2~3개씩 건너뛰어 내려가던 어린 내 모습이다.

국화꽃을 다루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아보였다. 어느 것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이 소중하게 만지고 가꾸셨다. 국화꽃 사이에서 꽃보다 더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는 장석남 시인의 시구처럼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가신”것만 같다. 칠남매 학비 대기도 벅찼던 그 시절에 국화는 아버지에게 무엇이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퇴직을 앞둔 아버지의 막막함을 달래주는 안식처였는지도 모르겠다.

새로 지은 집이 아버지 퇴직금이라는 것을 자식들은 까맣게 몰랐다. 이층집에 산다는 것에 들떠서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일이 힘에 부치고 괴로워서 쉬고 싶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퇴직금을 앞당겨 받아서 집 짓는 일에 당신의 모든 정성을 다 쏟으셨는데 자식들은 무심하기만 했던 거였다. 55년을 오상고절(傲霜孤節) 국화처럼 꼿꼿하게 살다가 어느 겨울 아침, 붉은 피 쿨럭 쏟아내고 열흘 만에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 칠 남매 뒷바라지가 당신의 임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더니 어찌 그리 홀연히 떠나셨는지… “우리 막내딸, 우등상 받아오는 거 보면 원이 없겠다”하셨는데, 그 소원 못 이뤄준 나는 아버지만 떠올리면 속수무책으로 너무 아프다.

언덕위의 하얀 집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문방구를 했다. 집 앞 중학교는 학교 앞이면 으레 있을 법한 문방구나 분식집 같은 것이 없었다. 학생들은 문방구가 필요했고, 엄마는 퇴직한 아버지를 대신할 수입원이 필요했다. 엄마는 거실하려고 남겨둔 공간에 떡하니 문방구를 차림으로서 자식들이 갖고 있는 거실의 환상을 묵살했다. 경쟁상대 없는 우리 문방구는 학교에서 내준 준비물을 독점해서 팔았고, 과자나 빵 등 주전부리를 갖추면서 장사가 그럭저럭 잘되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명색이 문방구인지라 학생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칠 때면 엄마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군부대를 퇴직한 아버지는 친구 회사에 시간제로 일하러 다니시고, 한창 사춘기였던 언니들은 문방구 근처에 얼씬도 안했다. 대신, 초등학생이지만 손이 부지런하고 셈이 빨랐던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갔다.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을 다 빠져나갈 즈음, 문방구도 한가해지면 엄마는 “우리 막내딸, 애썼다!” 토닥여주셨다. 그때의 나는 엄마 마음에 쏙 드는 딸이자 점원이었을 것이다.

다음 해, 여중생이 된 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지만 나는 언니들처럼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나는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문방구에 나와서 또래 남학생들에게 장사를 했다. 돈을 주고받을 때면 손끝이 스쳐서 부끄러웠지만 엄마를 돕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공부만 하던 언니들과는 달리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문방구에서 보내는 시간과 뒤섞여 지나갔다.

엄마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진시장 도매상가에서 물건을 받아오셨다.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온 학용품 보따리를 마루에 부려놓고서, 매출전표를 내게 건네며 단가를 불러보라고 하셨다. 나는 매번 반복하는 그 일이 지겨워서 대충 불러주기도 하고, 엄마가 다시 물어보면 짜증을 내며 또 불러주곤 했다. 나는 그때, 엄마가 글자를 모른다는 것을 몰랐다. 당신 이름을 쓸 줄 아셨고, 한글 읽는 것을 가끔 보았기 때문에 당연히 글자를 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바보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을까?-

엄마가 아는 글자는 받침이 없는 한글뿐이었다. 가나다라는 알지만 각, 간, 낙, 난은 모르셨다. 그래서 내가 불러주는 것을 듣고 학용품 단가를 하나하나 외우느라 “만년필은 얼마라고? 30매짜리 노트는 얼마?” 이렇게 몇 번씩 되물어 보셨던 것이다. 철없는 막내 딸년이 “엄마는 글자가 안보이면 돋보기를 쓰세요. 맨날 나만 괴롭히지 말고!” 짜증을 부릴 때마다 “더런 년. 안경 살 돈이 어딨노?” 하셨는데, 그때 엄마 마음이 어떠했을까?

해질 무렵, 부산에 도착해서 엄마가 계신 낯선 집 현관문을 열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딸을 휘둥그레 쳐다보며 “머할라꼬 왔노, 엄마는 개안타 개안타.” 울먹이는 엄마를 보듬고서, 괜찮지 않은 내가 울컥 눈물을 쏟고 말았다. “속이 상할 땐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고봉밥을 내놓는 엄마와 저녁밥을 대충 먹고 집터에 가보았다. 집이 헐린 자리가 볼품없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가뭇없이 사라진 집채와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콘크리트 잔해를 보니 실향민처럼 슬퍼졌다.

엄마가 칠순 넘어서까지 혼자서 문방구를 하며 칠남매를 키우고 결혼시킨 집이었다. 대문부터 옥상까지 아버지의 손길과 정성이 깃들어있는 집이었다. “이렇게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던 아버지는 5년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자식들은 아버지 덕분에 편히 지냈던 집이었다. 사라진 집은 서러웠지만 그 집에서 보낸 따뜻한 시절이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바깥 어둠은 끼리끼리 엉겨 붙고 잠자리에 누운 나는 엄마에게 엉겨 붙었다. 팔순 넘은 노모가 “휴우~ 개미들도 땅속 집이 있고 새들도 깃들 집이 있는데, 우리 막내딸은 친정이 이렇게 변변찮아서 우짜노?”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 철없던 막내딸은 순식간에 자라난 동화 속 콩나무처럼 어른스럽게 말했다. “엄마, 시집 간 딸한테 변변찮은 친정이란 건 없어요. 엄마가 계신 곳은 어디든 친정이지.” 딸의 대답이 흡족하셨던지 엄마는 “아이고, 우리딸 다 컸네. 한숨 푹 자고나면 다 꿈이면 좋겠다, 그쟈?” 천진하게 말씀하시며 살풋 웃었다.

엄마의 속절없는 바람처럼 꿈이면 좋겠지만 꿈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것을 세 아이의 엄마인 나는 안다. 집이 없어졌다고 아버지의 국화꽃, 엄마의 문방구, 내 유년시절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기억에서 사라진다면 그것은 내 꿈을 키워줬던 하얀 이층집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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