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희

- 정일근

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쌀이 열리는 쌀 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

농사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

쌀 한 톨 제 살점같이 귀중히 여겨온 줄 알지 못하고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라는 비밀을 까마득히 모른 채

서울은 웃는다.

<제18회 소월시 문학상 시집>에서

아주 오래 전 일이다. 24살 여고 동창생이 서울남자와 서울에서 결혼하던 날, 나와 단짝친구 2명은 난생 처음 우인대표라는 폼나는 완장을 가슴에 품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식장에서 우린 약속이나 한 듯 말을 아끼며, 친구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축하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친구들과 근처 호텔 커피숍에 마주 앉았는데, 그들의 세련되고 말쑥한 차림새는 '서울남자'의 표본처럼 보였다. 경이로운 서울의 호텔 커피숍에 이어 그들의 표준어에도 주눅 들까, 마음을 다잡는데 누군가 근사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요, 부산에서 오셨죠?”

“예...”

“부탁이 있는데요, 꼭 들어주셔야 해요.”

“먼데요?”

“쌀, 한 번 발음해 보실래요?”

“예?”

“쌀, 하고 한 번씩 말해보세요. 정말 쌀과 살이 구별 안 되는지 궁금해서요.”

“......”

너무나 순진했던 24살 부산 가스나들은, 낯붉힌 채 순서대로 돌아가며 "쌀.쌀" 거렸다. 그들은 내가 ‘쌀’하니까 까르르 웃고, 내 친구가 ‘쌀’해도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그들의 생경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우린 무슨 큰 실수라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서울 남자들의 호기심이 도를 넘었다는 것은 커피 한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알아버렸다. 서울의 호텔 커피 맛과 가치를 가늠해보지도 못하고, 부산 가스나들의 자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증명이라도 하듯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들의 무례함을 견디며 앉아있기엔 우린 젊었고 나름 콧대도 높았다. 우리는 곧장 남산에 올라갔다. 남산 벤치에 앉아 서울의 도심을 내려다보며 “서울 놈들 밥맛이야!!” 몇 번을 내뱉었다. 경이롭던 서울이 ‘밥맛인 서울!’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를 읽으니 문득, 우리를 골탕 먹였던 그 '밥맛인 서울 남자'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부산 촌가스나였던 그때의 나에게 쌀과 살이 ‘자존심’이었다면, 지금의 쌀과 살은 ‘그리움’으로 변했는데, 쌀과 살이 ‘까르르’였던 서울 남자의 ‘쌀과 살’은 지금, 무엇으로 변했을까? 변하기는 했을까? 사람 일 모르는 거지, 어쩌면 경상도 사투리 쓰는 아내와 함께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살.살’거리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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