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자원봉사 명예의 전당 헌액 1호 기록
공주 사곡 출신 32세 때부터 사회 봉사활동 참여
40년 서울생활 접고 2001년 조치원에 자리 잡아

지난 9월 30일 세종시자원봉사센터 명예의 전당 헌액1호자로 이름을 올린 윤은순 사랑의 가위손 단장(사진 오른쪽)
지난 9월 30일 세종시자원봉사센터 명예의 전당 헌액1호자로 이름을 올린 윤은순 사랑의 가위손 단장(사진 오른쪽)

“제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인데 분에 넘치게 축하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지난 9월 말 세종시 자원봉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이름을 올린 윤은순(68·조치원읍 오봉로) 사랑의 가위손 단장은 인터뷰가 부담스럽다며 어렵게 말문을 이어갔다. 올 여름 일찌감치 남편과 여행 계획을 잡아놓고도 봉사일정 때문에 포기했다. 추석연휴 직후 열린 세종축제 3일 내내 봉사활동에 매달렸다. 윤씨는 봉사를 천직으로 여기는 듯했다. 열흘간의 긴 휴일을 보낸 지난 11일 남편 이장환(70·前 기업은행조치원지점장)씨와  둘이 사는 자택에서 36년 봉사인생을 들었다.

“최근 들어 봉사자 사기를 올리기 위해 일정 자격을 갖추면 아플 때 돌봄서비스나 간병인 지원혜택을 준다고 해요. 전에는 무슨 댓가라는 게 있었나요? 시간을 세본 적도 없고, 어려운 사람 조금이라도 도와주면 좋은 일 아니냐는 마음으로 다 했죠.”

명예의 전당 헌액 1호는 관내 자원봉사 5천 시간이상 대상자 4명을 심사해 선발했다. 5천 시간은 하루 다섯 시간씩 꼬박 3년 가까이 채워야 한다.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30대 초반부터 36년의 봉사시간을 모두 합하면 지금의 몇 배는 될 듯 싶었다.

 

윤 씨는 현재 세종시자원봉사센터 소속 사랑의 가위손 단장을 맡아 이·미용 도움이 필요한 가정과 사회복지시설을 정기방문해 봉사한다. 두꺼비집수리봉사단, 새마을부녀회 조치원회, 재난재해 봉사단, 청춘봉사단에서도 활동 중이다. 무료급식, 푸드뱅크 물품 전달, 독거어르신들의 세탁물 수거와 배달, 목욕봉사, 재난재해봉사 등 윤 씨가 참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다. 긴급히 봉사가 필 요한 곳에서 연락이 오면 1년365일 ‘5분 대기조’처럼 달려가는 일도 윤씨 역할이다. 대통령 표창(2014년)을 비롯해 행정자치부장관 (2016), 세종시장(2014), 충남지사(2010) 표창을 두루 받았다.

32살 때부터 봉사활동에 참여

공주 사곡면 출신인 윤 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전 가족이 서울로 이사한 이후 40여년을 서울에서만 살았다. 은행원과 결혼해 3남 2녀를 키웠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자모회장을 맡았다. 1981년 32살 때다. 당시 15명의 학부모들이 치맛바람이 아닌 이웃을 위해 보람된 일을 하자며 의기투합해 어머니봉사단을 조직한 일이 사회봉사를 시작한 계기였다. 서울시립요양병원과 성남나환자촌을 다녔다. 보람도 있지만 땀과 눈물도 만만치 않았다. 첫 봉사모임에 함께했던 15명 중 이미 세상을 떠나거나 소식이 끊긴 이들을 제외한 4명은 30여년 이상 지난 지금도 매월 정기 모임을 가질 정도로 끈끈한 정을 나눈다.

“저희가 비용을 다 부담했지요. 김밥, 참기름장사도 하고 바자회 열어 기금을 마련했어요. 울고 떼쓰는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했다니까요. 무슨 정성이 그렇게 뻗쳤는지 몰라요.”

장애 아이를 한 달간 맡아 보살펴 준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아빠는 간질환자, 엄마는 정신장애자였다. 부모가 사고를 당해 봐 줄 사람이 없어 집으로 데려왔다. 말을 잘 할 줄 몰라 의사소통도 어려웠는데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느낌과 고맙다는 의사 표시를 온몸으로 나타냈다. 얼굴표정과 몸이 뒤틀리면서도 아이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가족들 모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나이 들면 고향 근처에 가서 살겠다고 젊은 시절부터 마음 먹었어요. 남편과 자식들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남편 고향인 강경과 서울, 공주 중간쯤 교통이 좋은 곳이면 되겠다 싶었죠”

40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2001년 조치원으로 이사한 윤씨. 스스로 좋아서 시작한 봉사활동에 퇴직한 남편도 파트너로 참여한다.
40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2001년 조치원으로 이사한 윤씨. 스스로 좋아서 시작한 봉사활동에 퇴직한 남편도 파트너로 참여한다.

2001년 현재 사는 집과 주변 1천여 평의 땅을 매입해 이사했다. 남편 정년퇴직 때까지 불과 몇 년 남지 않았을 때다. 아무 연고 없이 내려온 이주 초반 마음고생을 심하게 겪었다. 부동산 투기목적으로 이주했다느니, 곧 서울로 다시 올라갈 것이라는 뒷담화를 들었다. 마을 부녀회에 가입하고 노인회관 10원짜리 고스톱판에도 끼였다. 고스톱패를 잘못내면 “여지껏 이것도 못 배웠냐”는 지청구를 감수해야했다.

결국 한 번도 앓아본 적 없는 우울증이 와 병원 다니고 약을 복용했다. 2006년 어느 날 우연히 동네 길가에 내걸린 수지침 무료강습 안내현수막을 발견했다. ‘저거라도 배우러 다니면 사람을 더 많이 만나겠다’ 싶었다. 침봉사를 다니면서 속앓이도 덜해졌다. 2007년에는 이·미용 기술도 배웠다. 2009년 말 세종시 원안사수 투쟁에 참여한 주민들의 삭발농성 당시 초보 이발사로 수 십명 머리도 깎았다.

가족 응원이 가장 큰 힘

가족들이 윤 씨를 응원했다. 남편은 ‘밖에 나가 욕만 먹고 다니지 말라’고 격려했다. 퇴직한 남편도 봉사활동 파트너가 됐다. 집수리봉사를 하는 두꺼비봉사단에 참여하고 푸드뱅크 음식배달도 부부가 같이 한다. 남편은 “자신이 옳다도 생각하고, 하기로 마음먹으면 누가 보든 안 보든 확실하게 일을 한다”며 아내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자식들은 모두 출가해 서울에서 각자 가정을 꾸렸다. 윤 씨는 자녀가 중학생이 되면 방청소와 빨래는 직접하도록 교육했다. 반찬투정이라도 할라치면 “그럼 굶어. 배고프면 물에라도 말아 먹을테지.”라며 애써 무시했다. 자식들은 자립하는 힘을 길렀다. 학교나 직장에서 어려운 문제에 닥치면 ‘우리 엄마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스로 이겨냈다고 한다. 올해 90세인 친정어머니는 ‘봉사하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며 수 십 년째 딸 걱정이다.

“봉사가 중독성이 있다고 하는데 제가 꼭 그래요. 봉사를 하면 마음이 편해요. 댓가를 바라고 했으면 벌써 지치고 포기했겠죠. 몸 상태도 예전 같지 않은데.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늘 마음이 흐믓해요. 오히려 편하자고 가만히 있으면 몸살이 날 것 같아요.”

집 마당엔 빈 우유팩 수 백 개가 널려 있었다. 창고에는 폐지와 종이박스가 어른 키높이만큼 쌓여 있다. 재활용품으로 팔아 모두 새마을부녀회기금에 보탤 예정이라고 한다. 자원봉사물품을 보관하는 콘테이너도 집 입구에 보였다.

“요즘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랑 같이 놀아주는 것도 봉사인데 너무 다른 동네로만 다닌다’고 하세요. 치지도 못하는 고스톱판에 또 가야 될 까 봐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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