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희

시내 중고서점에 들렀다. 열병식에 임한 군인들의 뒷모습처럼 빼곡히 나열된 책 틈에서, 낯설지만 친숙한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책을 집어 들며,‘나 같은 사람이 또 있네’ 했다. 물건 못 버리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였다. 친정엄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이게 언제 물건인데 아직도 있냐, 젊은 애가 참 미련스럽다”고 타박하실 정도였다.

서점 한쪽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손끝에서 아무렇게나 나뉘는 쪽을 펼쳐 보았다. 공교롭게도 처음 눈에 들어온 글귀가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사람은 정신에 이상이 있다’였다. 세상에, 물건을 잘 못 버리기로서니 정신이 이상하다는 표현은 너무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작가가 내 면전에서 대놓고 얘기하는 것만 같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 정말 내가 정신이 이상한 건지 집에서 꼼꼼히 읽어보리라….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책을 사들고 나왔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부려놓기 바쁘게 책을 펼쳤다. “우리는 완벽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공간을 막고 있는 잡동사니에 슬기롭게 대처하고 앞으로의 삶을 즐기려는 것이다.”

서문에 앞선 짧은 두 줄의 글이 인상적으로 시작됐다. 본문의 내용도 어렵거나 특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잡동사니란 무엇인가? 잡동사니를 왜 버려야 하는가?’는 명확하게 인식시켜주었다. 또한, 작가의 메시지도 간단하고 분명했다. “잡동사니를 청소하라. 그리하면 삶이 풍요롭다"

작가가 말하는 잡동사니는 쓰레기와는 구별되는데, 쓰레기는 당연히 버려야할 것들을 버리는 것이지만 잡동사니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버려지는 것이었다. 쓰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물건들, 조잡하거나 정리되지 않는 물건들, 좁은 장소에 넘쳐흐르는 물건들, 끝내지 못한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다 잡동사니에 포함되었다.

책의 내용이 시종일관 ‘잡동사니를 청소하라’는 단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이상하리만큼 무겁고도 섬세했다. 목에 닿은 강아지풀처럼 내 감각을 자극했다. 평소에 잘 못 버리는 사람인 내가, 책을 읽던 중에도 벌떡 일어나 신발장을 정리하고, 베란다를 들여다보게 했다. 방방마다 둘러보고 옷장을 열어보고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러다 결국엔 거실 한 가운데 온갖 물건들을 다 꺼내놓고야 말았다.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이라 평균보다 많다고 감안해도 짐은 너무 많았다. 유행이 지났거나 작아서 못 입는 옷을 간직해둔 내 물건이 많았고, 남편의 오래된 취미생활 꺼리가 많았고, 부서지거나 갖고 놀지 않는 아이의 장난감이 많기도 하였다. 고장 난 물건에서 빼놓은 부속과 사은품으로 받은 그릇들과 몇 년이 지난 월간지들도 적지 않았다. 혹시나, 다음에, 어쩌면, 만약에… 이런저런 핑계대면서 차마 버리지 못한 잡다한 물건까지 꺼내놓으니 다섯 식구가 충분히 버거워할 만한 짐이었다. 미련이 남아 물건이니 짐이니 하지만, 책에 따르자면 이 모두가 ‘잡동사니’였다.

집 앞 슈퍼에서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한 개를 샀다. 어제까지 못 버리던 사람이었던 나는 쓰레기봉투를 앞에 두고 또 망설였다. 잡동사니라고 꺼내놓기는 했는데 선뜻 버리질 못했다. 쓸 만한 것은 이미 이웃들에게 나눠줬음에도 미련이 남았다. 잡동사니 하나를 들고 아까워라, 그랬다. 사람 마음 변하기가 그리 쉬운가, 했다. 그러다 베란다로 나갔다. 잡동사니를 정리한 후 넓어진 공간을 은근히 쳐다보았다. 베란다 구석은, 물건 몇 개는 항상 쌓여있어야 자연스러운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비어있는 베란다는 평화롭고 충만했다. 무소유가 충만하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옳았구나 싶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없었고 갈 때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누군가에게서 빌려 쓰는 것이다.”

그랬다. 난 내 것도 아닌 것을 너무 오래 소유하고 있었다. 아끼는 마음이 지나쳐 집착하고 있었다. 이젠 다른 사람에게 돌려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결심이 서자 마음 끝자락이 바람결에 날아갈 듯 가벼웠다. 거실로 돌아와 잡동사니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끝낸 다음 날은 몸살을 앓았다. 강산이 변할 만큼 살림을 꾸리지도 않았는데 잡다한 물건이 왜 그리 쌓여있었는지 나도 놀랐다. 잡동사니를 청소했으니 집이 넓어지고 가벼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줄어든 살림살이보다 내가 지고 있던 삶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잡다한 생각들은 잡동사니와 함께 쓰레기봉투 속에 꾹꾹 눌러 담고, ‘많이 가진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니니, 더 이상 가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다짐 하나만 오롯이 남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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